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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01 운영자 2026-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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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9:28-36절 개역개정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투사할 ''을 주조하곤 합니다. 고통을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고, 일상의 안락을 보장하며, 내가 설계한 성공의 지도를 승인해 줄 강력한 영웅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 그 자체가 아니라, 내 욕망의 결핍을 채워줄 '천상의 자판기'일지도 모릅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의 군중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입성하시기 직전, 그분은 '열 므나의 비유(19:11-27)'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당장 정치적 혁명으로 임할 것이라는 군중의 성급한 기대를 교정하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열광에 도취한 이들에게 메시아는 오직 로마를 무너뜨릴 정복자여야만 했습니다. 이 지독한 오해와 진실 사이의 간극,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 입성이 보여주는 거대한 아이러니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줄곧 걸어오셨습니다. 하지만 성전 입구에 이르러 굳이 나귀, 그것도 짐을 실어본 적 없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기로 하셨습니다. 성인 남성이 타기에 다소 우스꽝스럽고 불편했을 이 선택은,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예언적 퍼포먼스'였습니다.

()이 권력과 정복, 전쟁의 서사를 상징한다면, 나귀는 겸손과 섬김, 그리고 평화의 언어를 대변합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99절의 예언을 온몸으로 재현하시며, 당신이 세우실 나라가 무력이 아닌 죽기까지 낮아지는 사랑으로 통치되는 곳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8)

 

세상의 정복자들은 피의 제단 위에 자신의 성을 쌓지만, 이 진정한 왕은 자기 피를 흘려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나귀를 구하러 간 두 제자는 당시 주님의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굳이 남의 나귀를 가져와야 하는지, 이 행위가 어떤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알지 못한 채 '이해의 한계'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해야 순종할 수 있다'는 이성의 교만을 내려놓고, 주님의 명령에 몸을 맡겼습니다.

나귀 주인의 질문에 그들이 내놓은 답은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이 짧은 문장 속에 모든 논란을 잠재우는 주권자의 권위가 담겨 있었습니다. 신앙은 종종 논리의 완결이 아닌, 이해되지 않는 지점에서 투신으로 증명됩니다. 제자들 역시 이 모든 사건의 내밀한 의미를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훗날 성령이 임하신 뒤에야 비로소 '아하!' 하는 깨달음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순종이라는 임계점을 넘을 때, 비로소 진리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법입니다.

 

군중들이 길에 겉옷을 펴는 행위는 단순히 환영의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왕을 옹립할 때 행하던 노골적인 정치적 의식 절차였습니다. 그들은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다윗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로마의 압제를 끊어내기를 갈망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누가복음 19:38)

 

여기서 기묘한 대비가 일어납니다. 군중은 '땅 위의 전쟁'을 이길 영웅을 노래했으나, 예수님은 '하늘의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구했으나, 예수님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용해 '나의 나라'를 확장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그분의 나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왕과 우리에게 필요한 왕 사이의 이 거대한 괴리야말로 오늘날 우리 신앙이 직면한 가장 아픈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환호 속에 숨겨진 날 선 배신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지금 "호산나"를 외치는 저 뜨거운 입술들이 불과 며칠 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차가운 저주로 변할 것을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평판이 얼마나 휘발적이며, 대중의 열광이 얼마나 악한 의도로 뒤바뀔 수 있는지 그분은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서(19:28)' 가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우쭐거리지도, 그들의 거절에 좌절하지도 않는 '주권적 초연함'이 그분께 있었습니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 하나의 북소리에 맞춰 걷는 삶. 그 단단함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부끄러운 자리조차 개의치 않고 묵묵히 걸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 겸손과 순종의 길을 완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화려한 말()을 타고 싶어 하며, 타인의 환호에 목말라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실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실 때, 비로소 우리는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은 내 인생의 주인공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성공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땅의 보상이 아닌 하늘의 가치를 위해 걷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욕망을 채워줄 왕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삶을 통치하실 진짜 왕을 따르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길은 좁고 험해 보이지만, 그 길의 끝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돌려, 겸손히 나귀를 타신 그 왕의 뒤를 따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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